일상

죽어도 괜찮겠어요

Shaoli 2019. 8. 31. 20:46

 

붕괴될 것 같은 불안이 커지면서 분석 회기를 주 1회에서 2회로 늘렸다.

다행히 주말 사역을 하고 있어서 돈이 모자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돈 쓰기 넉넉한 형편도 아니라 맘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2회로 늘린 뒤로 훨씬 많은 안정감이 생겼고, 홀로 일주일을 버티지 않고 길어야 4일을 버티면 됐기 때문이다.

화요일에 분석이 끝나면 이틀 뒤가 더 있다는 것에 괜히 어린아이의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도무지 엄마와 함께할 시간을 얻기 힘든 아이가 "엄마가 나를 한 번 더 봐 주기로 했어요."라며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동시에 일상에서 느닷없이 오후부터 피곤이 쏟아져 눈 뜨기가 힘들고 집중할 힘이 없었다.

퇴근하면 집에 가서 저녁도 먹지 않고 잠부터 자야겠다고 작정할 정도로 피곤했고, 저녁 8시부터 자도 출근할 시간까지 잤다.

사실 정신이 잠자는 것 같은 느낌은 예전에 병들었을 때와 비슷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혹시 계절이 바뀐 탓이 아닐까 생각했다.

결국 예상처럼 퇴행의 결과였다.

아버지의 역할이 아직은 필요 없던 영아기 때, 엄마가 자고 있는 나를 돌봐 주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 소망 때문에

나는 계속 잠으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저항할 수 없이 잠 오는 가운데 문득 "죽어도 괜찮겠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고, 모두가 잘 지내고 있어서 흐뭇한 가운데, 내 할 일을 다했고 더 이상 아쉬울 게 없는 그런 안도감이었다.

이제 내가 보살펴야 할 것들이 없고,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 죽어도 괜찮겠다는,

그렇다고 죽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한편 세상 사는 것도 이만큼 살았으면 됐고, 내 삶에 부끄럽지 않게 매일 충실했으며,

그렇게 살 수 있던 모든 시간에 고마움을 느꼈다.

사람이 죽을 때 세상과 아름답게 이별하는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그것이 '늘 사람을 보살펴야 했던 나'가 이젠 죽어도 괜찮겠다인 동시에 '이젠 내가 돌봄받았으면 좋겠다'를 뜻하는 것도 분명하다.

죽으면, 모든 세상에 대한 돌봄을 멈추고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겠지. 있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지난날 내가 퇴행했던 기도의 시간들 또한 나를 가장 행복했던 영아기의 경험을 되살려 준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분석을 마치고 집에 와서 잔 뒤, 다음 날 아침 유난히 밝은 햇살이 온 집안을 채웠다.

살면서 내가 눈물골짜기를 지나올 어느 때마다, 눈 뜨면 이렇게 황금빛 햇살이 나를 환하게 비춰 줬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정말로 늘 그런 눈부신 날이었다.

가을이 되어서인지 여유로운 출근길에도 선선한 바람과 함께 계속 밝았다.

그렇다고 전처럼 모든 것이 괜찮아진 건 아니다.

어쩌면 '엄마가 나를 더 봐 주기로 했어요' 뒤에 반드시 상실이 따라올 거란 불안에 대한 저항에서 온 퇴행일지도 모르겠다.

갈수록 나는,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지.

사랑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