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e
난 아직 다 울지 않았어요 - 고난주간과 부활절 이후 만난 예수 본문
아직 다 울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단다.
먹던 것을 채 소화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위 속이 비어 버린 것 같은 이 이상한 기분은 뭘까.
해마다 오는 고난주간과 곧 이어지는 부활이
이렇게 형식적일 수 있을까 싶었다.
난 사실 아직 교회에서 예수의 십자가도 보지 못했고
닫힌 무덤과 열린 빈 무덤도 보지 못했다.
개신교회는 이렇게 고난의 둘레에다 울타리 쳐 놓고,
그 밖에서 저만치 떨어져 고난과 부활의 신비를 구경하게 하는 데 그친다.
누구도 고난에 대한, 부활에 대한 신앙체험이 없는지,
강단에서는 이론적이고 당위적인, 책 펼쳐 보면 볼 수 있는 이야기들만 짧게 선포하고 끝났다.
그 뒤를 채운 건 칸타타 3-4곡이었다.
물론 부활을 아무리 설교해도 신비는 열린 자에게만 들리고 인간적 방법으로 부활을 와닿게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설교가 아니고 접촉과 연결의 문제였다.
아마도 이 기간에 교회는 그리스도와 접촉하려고 시도했고 접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분의 수난과 부활을 접촉만 했을 뿐 거기에 연결되지는 않았다.
단지 배경음악처럼 자기들 볼 일 바쁜 중에 귓가를 스치다 주일 저녁이 된 동시에 부활도 증잘돼 버렸다.
코스프레처럼 부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분위기를 내면 그만이었다.
진정 고난에 동참한 사람, 부활을 기뻐한 이는 내 눈에만 안 보인 걸까.
나조차도 연례 행사 보조에 맞추지 못해 부활을 충분히 준비하며 맞지 못했으니 이대로 끝나 버린 게 이상하게 느껴질 만하다.
가톨릭(아마도 동방정교회에서도)에서는 고난주간에 성목금토일이 있고, 토요일 밤에 있는 부활 성야 미사가 이 기간의 가장 큰 의식이다.
‘루멘 크리스티’(그리스도의 빛)로 시작하는 부활 성야 미사는 모두가 초를 하나씩 준비하고 어두컴컴한 중에 대표가 불을 켜서 오면 뒤에서부터 그 불을 이어받아 초를 밝혀 나간다. 어둠이 점점 밝아져 올 때 죽음이라는 어둠에서 주님이 부활하심으로써 빛을 비추셨다는 의미가 살아난다.
이 또한 형식적이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고난주간을 지내는 그 무게에서는 분명 개신교와 차이가 있다.
부활 대축일이 끝나도 한동안은 가톨릭 신자들의 인사는 “부활 축하드립니다.”이다.
대략 1-2주간은 그렇게 하는 인사가 그나마 부활이 하루 행사로 잠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계속 되새기고 부활이 현재진행형임을 일깨워 준다.
가톨릭 신자들은 부활 대축일이 끝난 다음에 ‘엠마오’를 가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와 함께 가시면서 집에 유하고 떡을 떼셨던 것처럼,
봄꽃 만개하는 좋은 날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공동체가 야외로 나가 기쁜 교제 시간을 갖는 시간을 말한다.
개신교도 부활절 이후에 야외예배를 나가곤 하지만, 바깥으로 나가는 건 같아도 그 의미가 엠마오를 기억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을 개신교에서 이토록 가볍게 다루는 데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아직 다 울지 않았다.
위의 이야기와 별개로 내 안의 상실과 슬픔을 애도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해서 뒤늦게 앓는 몸살일 수도 있다.
내 슬픔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절기 맞춘다고 억지 축제를 벌리는 게 내키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이번 부활주일을 지내면서 고난과 부활의 구경꾼 되기를 그만둘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울타리를 떠날 마음먹으면서, 그 속에 갇힌 예수를 꺼내어 함께 밖으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난 정말 이 죽은 의식들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하자고, 제도교회 속에서 종교 놀이 그만하고 진정한 나와 ‘예수’를 되찾자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눈 앞에 보이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거기 있던 구경꺼리 예수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예수에게 물었다.
“예수야, 너의 이름은 하나님의 구원이란 뜻이지 않니. 너가 이 시대를 살았다면 너는 어떻게 그 이름대로 구원을 펼쳤겠니. 너도 결코 이 종교제도 안에 갇혀 있지 않았을거야. 하나님은 그 안에만 계시지 않으니까.”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일방적으로 예수를 끌고 나온 것 같아 발 떼는 데 조금 망설여졌다.
그리고 갈 곳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지만 꼭 가야 할 길이라는 게 뚜렷하지 않았다.
눈 앞은 안개만 펼쳐 있는 듯했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데, 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던 예수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든 가면 되지.”
나는 그때서야 울타리에서 꺼내 온 예수가 나의 ‘예수’-나의 구원이란 걸 알아차렸다. 내 뒤엔 다른 사람들의 예수가 여전히 갇혀 있었다.
언제 안에 있게 된 건지 모르겠는 나의 예수를 밖으로 꺼내 오자 그제야 예수와 함께 앞으로의 내 삶을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나는 그동안 혼자였고 두렵고 외로웠다는 걸 알았고, 하지만 이젠 어딜 가도 상관없어졌다.
사방천지가 내가 예수와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어디든 가면 된다는 말에 그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예수의 말대로 어딜 가도 구원이 나와 함께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 멀어진 구원을 이제야 손 내밀어 잡은 것이었다.
교수님이나 개신교에 대한 죄책감이나 빚진 미안함도 더 이상 가질 필요 없었다.
어디나 내가 갈 곳이고 어딜 가도 괜찮다.
구원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니 외로울 것 없었다.
그러고 나니 한껏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이대로 있어도 상관없고 그만둬도 상관없는,
중요한 건 구원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뿐이었다.
울타리를 등진 채 눈물 닦으며 코를 훌쩍였다.
‘예수’는 가만히 내 옆에 그대로 있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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