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일상 (30)
Zoe
장맛비 내리는 날, 하루종일 발코니에 있는 화분 정리했다.더 이상 꽃필 힘 없어 보이는 꽃양귀비를 치우고 그 자리에 나비바늘꽃(가우라) 모종 10개를 심었다.핑크뮬리들 자리 배치도 다시 해 주고, 퇴비와 분갈이 흙도 주문했다.핑크뮬리들이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이리 놓아도 저리 놓아도 어수선해 보였다.화분 옮기다 길다란 잎에 눈이 찔려서 한참 눈을 못 떴지만 어린아이들 장난에 다친 것 같아 나무라지도 않았다.애들이 파릇해서 힘이 좋구나 하면서 조심조심 옮기고 또 옮겼다. 간밤에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 옆집 벚꽃나뭇잎들이 정신없이 내는 파도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렸다.자다가 핑크뮬리들과 나비바늘꽃은 괜찮을까 해서 일어나 발코니에 나가 봤는데, 옆집 정원만큼 바람이 사납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까지도 다행히 애들이..
영성을 공부하던 그때가 그리웠다.이제는 그렇게 깊이 침잠할 수 있는 상황도 허락되지 않거니와 나는 또 다른 정신여정을 가고 있고,아직 도중이라 가끔 아득히 멀어진 그 시절을 회상하며 잠깐 그리움에 잠길 뿐이다. 무신戊申 대운이 곧 지나가고 정미丁未 대운이 온다.차가운 사주인 나에게 무신은 아마도 일하고 공부하며 방랑하고 고생길을 떠돌아 다니는 운이었던 것 같다.무戊가 있어야 범람하는 나를 제방해 주지만 또한 나를 극하니 결국 10년간 나를 가둬 놓고 단련시켜서 어디다 쓰려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정미丁未 대운은 나에게 목을 생하는 정화丁火, 그리고 뜨거운 땅인 미토未土니 어떤 10년이 될지 몰라도 분명한 건 전보단 좋을 거라는 것이다.사실 난 을미乙未년에 크게 앓아 누웠어서 귀도鬼道인 未가 오는 게 맘이 ..
16살에 어머니는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관을 땅속에 묻었다. 30살 초반에 친구의 아버지는 화장하고 납골당에 모셨다. 그리고 37살, 후배의 아버지를 화장하고 유골을 땅속에 묻었다.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있어 본 게 3번째다. 그동안 조문은 빠지지 않고 다 갔는데, 37년 동안 장지까지 간 게 3번뿐이라니 스스로에게 의외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갑작스럽게 맞아서 언제나 그 어마어마한 충격을 아주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방어가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상처 받지 않으려면 죽음을 항상 가까이 두어서 언제 어느 때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죽음이 예고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경우엔 생각보다 그렇게 받아들이기 고통스럽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는 걸 이번에 보게 되었다. 오히려 고통스럽..
생수 2리터 6개 한 묶음 가운데 가장 저렴한 게 2000원짜리다. 내가 생수를 사 먹은 지도 얼마되지 않는다. 그 전엔 회사에서 물을 떠다 집에 가져가서 마셨다. 500ml 한 병을 담고 가면 저녁부터 아침까지 마실 수 있었고, 그걸로 부족할 때도 있어서 2병 정도 쟁여 놓기도 했다. 매일 꾸준히 500씩 담아 갔지만 물이 부족해서 1리터를 담아 가야 하는 날은 물만 들어 있는 게 아닌 가방에 어깨가 짓눌려 만원 지하철 안에서 낑낑대던 괴로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이 무거운 게 아니라 삶이 고단했던 거겠다. 그때 살던 집은 녹물이 심하게 나와 그 물로 무얼 해 먹을 수 없었다. 밥 해야 하는 날이나 라면을 끓여야 하면 물 500cc는 한번에 다 쓰니 출퇴근길 1시간 거리에 물을 이고 다니는 서울 사람은..
코로나19로 오프라인 예배가 중단된 지 한 달 지났다.처음엔 토요일에 설교 준비하지 않아도 되어 기쁘면서도 갑자기 비어 버린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좌불안석이었다.할 일은 평소에도 많았기에 설교 준비하지 않는 시간 동안 놀 수 있거나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단지 우선순위를 바꿔 다른 할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일정 변화가 일어난 것뿐이었다. 코로나19로 예배 중단된 3주째가 가장 답답하고 힘들었다.사람들도 불안했는지 단톡방에 이런저런 국제적 음모론이나 현 정부의 무능, 또는 신천지에 관한 동영상 등을 올리다가4주째가 되니 은혜의강 교회 감염 확산건이 터지고, 또 각자 안정되어 간 건지묵상, 기도, 좋은 글, 웃음 주는 영상 등 서로의 안부 근황을 묻고 나누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물론 그렇게 ..
올해 처음 산 화분이다. 며칠 전부터 꽃집 앞에 히야신스들이 흰색, 분홍색, 파란색으로 화사하게 피어 있어 살지 말지, 어느 색을 살지, 몇 개 살지 고민했다. 그리고 퇴근길에 꽃집이 아직 문을 닫지 않아 큰 맘먹고 히야신스들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어느 앨 데려갈까 보는데, 갑자기 구석에 딱 두 개 남은 화분이 눈에 띄었다. 보자마자 희귀하단 생각에 하나씩 집어 들어 이리 보고 저리 봤다. 그리고 많은 히야신스를 뒤로하고 이 이름 모를 꽃 하나를 사기로 했다. 꽃집 사장님께 꽃 이름이 뭐냐고 하니 일본산인데 어쩌구저쩌구라고 하셨지만 생각보다 이름이 길어 알아듣지 못했다. 3000원 내고 집에 데리고 와서 가만히 다시 봐도 사랑스러워서 맘에 들었다. 알아보니 이름이 '방울 기리시마'란다. 일본에서 품종 개..
작년 핑크뮬리를 심은 화분에서 내가 심지 않은 잡초가 났다. 봄맞이 꽃들을 좀 사다 심을까 했는데 공짜로 꽃이 났다니 뜻밖의 작은 손님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흙을 가만 놔 두면 나중엔 쑥도 나고 냉이도 나고 민들레도 날까?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서 화분에 앉아 뿌리내렸으면 좋겠다. 한 철 편히 쉬다 가든 흔들리다 가든,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될 테니. 올해는 인연 닿는 씨앗을 심어 봐야겠다.
외국 국적포기 승인 난 날이 딱 내 37번째 생일날이었다.37년의 외국인 신분에서 날 놓아 준 게 생일선물이었나,생존을 위해 포기한 국적이어서인지 기쁨보다 착잡함이 더 컸다.국적 포기 허가 증서를 더 보고 있다간 울 것만 같아서 얼른 서류봉투 속에 다시 넣었다.세종로 출입국 사무소에 가서 외국 국적 포기 확인서를 받고 주민센터에 주민등록 신청을 하면 한국인 신분이 된다.나에겐 그게 피난 같은 인생에서 하루 먹을 쌀이라도 얻을 수 있는 생명줄같이 느껴졌다.지난 외국인으로서 이 땅에 사는 불편함은 생활의 불편함에 내재된 수많은 정신적 외상에서 비롯한 장애와 결핍의 불편함이었다. 저녁엔 집에 와서 좋아하는 중국 예술인이 나온 프로그램들을 보았다.이 사람을 볼 때마다 왜 그렇게 울게 되는지, 4시간 동안 보면서..
몇 달간 틈 나는 대로 사주를 분석하고 운세를 검증했다. 물론 앱이나 사이트들의 ‘오늘의 운세’는 간단히 띠로 풀어 주거나 조금 더 성의 있는 곳은 천간일주로 풀어 주니 그 풀이들이 나에게 딱 들어맞을 순 없었다. 운세 설명해 주는 영상을 보니 대략 2020 庚子경자년은 庚金과 子水이므로 壬水戌土임술인 나에게 子水가 뿌리 힘이 되어 주어서 새 일 벌리거나 이직하는 등의 강한 움직임과 추진력을 보이지만, 戌土가 남편 또는 직장에 해당하므로 평소에 얌전히 있더니 갑자기 받아 버리니 구설수나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일은 벌리는 게 삶이라고, 조심할 건 조심하고 하려던 일을 하라는 설명. 그리고 庚金은 나에게 문서, 공부에 해당되니 올해는 공부하는 머리가 잘 돌아갈거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