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e
세 번째 하관식, 죽음의 신비 본문
16살에 어머니는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관을 땅속에 묻었다.
30살 초반에 친구의 아버지는 화장하고 납골당에 모셨다.
그리고 37살, 후배의 아버지를 화장하고 유골을 땅속에 묻었다.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있어 본 게 3번째다.
그동안 조문은 빠지지 않고 다 갔는데, 37년 동안 장지까지 간 게 3번뿐이라니 스스로에게 의외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갑작스럽게 맞아서 언제나 그 어마어마한 충격을 아주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방어가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상처 받지 않으려면 죽음을 항상 가까이 두어서 언제 어느 때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죽음이 예고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경우엔 생각보다 그렇게 받아들이기 고통스럽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는 걸 이번에 보게 되었다.
오히려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것보다 편안히 돌아가는 게 모두가 바라는 바가 되어서,
이별은 슬프지만 모두를 위해 서로 손을 놓을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누구도 무너지지 않았고 담담하게 고인을 환송하고자 했다.
그러고 보니 어른이 된 사람들은 대개 큰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마주하고 대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가까이 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는데,
나야말로 16살에 멈춰서 죽음이 나에게 그랬듯 모두에게 무섭고 기피하려 하는 것이라고 여겨 왔던 것이다.
20년 동안 죽음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이제야 깨어났다.
오늘 발인예배와 하관예배에서 죽음과 부활의 말씀이 다시 귀에 들렸다.
죽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간 이와 아직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 모두가 아름다운 대비와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죽은 이는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한 현존과
눈에 보이는 세계 이면에서 죽음을 감싸안음으로 완전한 살아 있음-생명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삶이 아름다워서 울었고,
장지로 오가는 길에 보인 가로수들은 일상의 사소로운 갈등들과 어리석음들을 다 날려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죽은 싸움은 모든 게 헛되다.
그래서 예수는 병자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었을 것이다.
목사가 되는 것에 대해,
진정 이 직업이 인간의 삶과 죽음을 동반하는 직업이라면 안수를 받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늘처럼 삶과 죽음을 동반하는 직업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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