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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꿈속에서도 일여(一如)여라

Shaoli 2020. 7. 24. 14:41

 

장맛비 내리는 날, 하루종일 발코니에 있는 화분 정리했다.

더 이상 꽃필 힘 없어 보이는 꽃양귀비를 치우고 그 자리에 나비바늘꽃(가우라) 모종 10개를 심었다.

핑크뮬리들 자리 배치도 다시 해 주고, 퇴비와 분갈이 흙도 주문했다.

핑크뮬리들이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이리 놓아도 저리 놓아도 어수선해 보였다.

화분 옮기다 길다란 잎에 눈이 찔려서 한참 눈을 못 떴지만 어린아이들 장난에 다친 것 같아 나무라지도 않았다.

애들이 파릇해서 힘이 좋구나 하면서 조심조심 옮기고 또 옮겼다.

 

간밤에 비바람이 심하게 불어 옆집 벚꽃나뭇잎들이 정신없이 내는 파도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렸다.

자다가 핑크뮬리들과 나비바늘꽃은 괜찮을까 해서 일어나 발코니에 나가 봤는데, 옆집 정원만큼 바람이 사납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까지도 다행히 애들이 무사했다. 바람에 놀라 밤새 뿌리를 단단히 내렸을까.

내가 심지 않았는데 절로 자란 채송화들은 바람 막아 준 핑크뮬리 옆에서 보석같이 꽃 두 송이를 피워 냈다.

 

누군가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숙면일여)'에 대해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언젠가 신부님께 내 꿈 이야길 했더니 그걸 불교에서는 몽중일여라고 한다고 하셨다.

떠오른 김에 글 몇 개 찾아보는데 저렇게 사람들이 수행의 단계들을 목적 삼는 데 안타까움이 일었다.

어떤 세분화된 체계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알고 싶어서 알고자 했고 알고자 하니 많은 지식들을 알게 됐어도 머리만 채웠을 뿐 내 지식이 아니다.

어떤 상과 목적을 더 촘촘히 체계화해내서 확장감이 있을지언정 진짜 판은 거기에 있지 않다.

문자로 적힌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그걸 따르려고 한다면 문자 안에서 놀아날 뿐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에고란 말도 잘 쓰지 않고 전문용어나 새로 배워서 익혀야 하는 개념어들을 잘 쓰지 않는다.

자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숙면일여).

움직일 때에도, 꿈에서도, 잠들어 있을 때에도 깨어 있는 것.

불교에서는 수행적 차원에서 이 의미를 화두를 잡고 있는 거라고 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일여'의 상태, 한결 같고 그대로 있는 나는 화두를 '잡고 있는' 나가 아니다.

아무것도 잡지 않고 깨어 있을 때나 꿈에서나 깊이 잠들었을 때나 변하지 않는 나는

수행자들 사이에서 앞다투어 레벨 올리듯 달성할 단계나 목적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많은 설명, 논쟁도 내가 놓지 못하는 머릿속 체계와 논리, 사고들을 바탕으로 한 허상 위에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참은 그 모든 것 아래에 있다.

내려갈 수 있는 자만이 언어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나 자신을 알고, 얻고, 나로 살게 된다.

물론 대부분 사람은 그러지 않고도 살아간다.

그럼에도 이 길을 좇으려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진리를 찾는다며 이 외진 길을 계속 따라오지만 실상 오만의 껍데기로 무장한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속은 자와

진실로 사랑의 부름을 알아듣기 위해 자신을 놓고 잊고 놓고 잊고를 거듭하며 겹겹 세월의 거짓 옷들을 하나하나 벗어내고 있는 자다.

그리하여 참이 비출 때 자신을 알게 되고, 있는 그대로 깨어 있게 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그대로 보고 느끼며 희노애락, 생노병사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다.
그의 살아 있음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과 같으며 겨울이 지나면 이 땅에서 차례차례 되살아나는 생명의 생기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