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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삶의 여유 그리고 다음 시절 맞기

Shaoli 2020. 4. 4. 12:50

생수 2리터 6개 한 묶음 가운데 가장 저렴한 게 2000원짜리다.

내가 생수를 사 먹은 지도 얼마되지 않는다.

그 전엔 회사에서 물을 떠다 집에 가져가서 마셨다.

500ml 한 병을 담고 가면 저녁부터 아침까지 마실 수 있었고,

그걸로 부족할 때도 있어서 2병 정도 쟁여 놓기도 했다.

매일 꾸준히 500씩 담아 갔지만 물이 부족해서 1리터를 담아 가야 하는 날은

물만 들어 있는 게 아닌 가방에 어깨가 짓눌려 만원 지하철 안에서 낑낑대던 괴로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이 무거운 게 아니라 삶이 고단했던 거겠다.

 

그때 살던 집은 녹물이 심하게 나와 그 물로 무얼 해 먹을 수 없었다.

밥 해야 하는 날이나 라면을 끓여야 하면 물 500cc는 한번에 다 쓰니

출퇴근길 1시간 거리에 물을 이고 다니는 서울 사람은 나 말고 몇 없었을 거다.

생수를 사지 않았던 건 물론 2000원도 아까워서였고, 2000원도 아껴야 해서였다.

어느 여름날 물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언덕 아래 편의점에 가 가장 싼 생수 6개 한 묶음을 샀다.

3천 얼마였을 거다.

그런데 집에서 5분도 안 되는 언덕을 12리터 물 안고 오르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차길에는 차들이 가볍게 나를 앞질러 숭숭 지나가는데 나는 쉬어 가려다가도 좁은 인도라 적절치 않고,

들었다 올렸다 하다가 팔에 힘이 더 빠지면 언덕 넘어 언덕 집까지 물을 굴려서 갈 수도 없고,

그냥 내려놓고 쉬었다가 가기를 반복해도 됐겠지만 당시엔 그럴 마음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5분 거리로 물도 못 나르는 게 서글펐고, 이 설움을 빨리 끝내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행히 집까지 물을 가져올 힘이 있었고 다음 날 근육통으로 팔을 못 쓸 줄 알았지만 별일 없었다.

그 뒤로 다시는 12리터 물을 생으로 옮겨 갈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서야 재정이 조금 안정이 된 뒤로 비상용으로 6개 묶음 2000원짜리 물을 사다 놓았다. 물론 마트 배달로.

그 물도 아까워서 회사에서 계속 물을 떠오면서 물이 다 떨어졌을 때에야 마셨다.

그나마 비상용이라도 있어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서러운 건 물이 너무 맛없다는 것이었다.

마실 때마다 쓰고 거친 맛이 나는 게 어느 땐, 꽤 자주 목 넘기기가 괴로웠다.

그 맛없는 물을 2년 가까이 비상용으로 마시다가 최근에서야 3000원짜리를 살 재정 여유가 생겼다.

정확히는 마음의 여유다.

3000원짜리는 놀랍게도 목 넘김도 부드럽고 단맛까지 나

마실 때마다 고마움과 감동을 느낄 만큼 2000원짜리와는 너무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3000원짜리로 계속 사 마실 생각도 없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배출된, 배출될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버겁게 마음에 걸려서다.

 

녹물 나오는 집에서 정상적인 물 나오는 집으로 이사 오니 쌀 씻고 면 끓이고 커피 내리는 물은 수돗물 쓴다.

마실 물은, 재정 형편이 훨씬 나아지면 정수기를 쓸지 모르겠지만 그날은 요원할 테고,

지금으로서는 회사에서 물 떠다 오는 것 외에 환경에 이로운 방법이 달리 없어 보인다.

결국 생활환경이나 재정 상태는 좋아졌지만 출퇴근하며 물 떠오는 생활방식은 그대로다.

달라진 건 '여유'뿐인데, 사실 얼마만큼 여유가 있어야 내가 좀 더 숨통 트이는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달은 코로나19로 4/5를 재택근무하면서 평소보다 전기렌지와 노트북 등으로 전기를 많이 써 3030원 나왔다.

가스비는 평소보다 덜 씻었으니 덜 나올 것이고 수도세도 그럴 것이다.

이사 와서 다달이 합리적 공과금이 나오는 게 가장 기쁜 일이다.

지금 사는 집도 좋고 모든 게 잘 되어 가고 있지만... 쌓인 빚 때문에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는 다음 시절을 준비하는 때인 듯하다.

우여곡절 많던 지금 직장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고, 돈 더 벌 욕심도 내려놓았다.

악착같이 더 벌어서 조금 더 여유를 누리는 것보다 정말 해야 할 일, 재밌고 즐거워할 일을 시작하는 게 지금 삶에 대한 예인 것 같다.

이때를 위해 그동안 충분히 열심히 배우고 살았으니... 아직 빚이 남아 있지만 숨 좀 돌려도 괜찮을 때 아닌가.

게다가 집 코앞이 마트와 편의점이어서 전처럼 물 나르는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창밖 화분 위에 옆집 정원에서 날아온 벚꽃잎들이 내려앉았다.

지인의 임종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에, 내 집 앞으로 찾아온 봄이 따듯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