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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소녀가장, 인생을 혼자 책임진다는 것

Shaoli 2019. 5. 24. 19:40


치과 치료 때문에 생긴 예상치 못한 85만 원 지출이 내겐 너무 큰 좌절로 다가왔는지,
나는 다시 고아가 되어 세상을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월급날은 바로 한 주 뒤였지만 내겐 여전히 갚아야 할 빚들이 있었다.
50만 원 빌려준 선교사 오빠는 극구 돈을 받지 않겠다 해서 다음에 노동력으로 빚을 갚겠다고 했다.
130만 원을 주며 반드시 에어컨을 사라는 막내이모의 당부를 두고 한참 고민하다가 80만 안 되는 에어컨을 샀으니 50만 원이 남았다.
여동생이 아버지한테 50만 원을 빌리고 나에게 또 빌려 주었는데, 그 돈을 아버지가 받지 않겠다 해서 50만이 그대로 남았다.
이렇게 150만 이상의 여유가 비상금으로 남아 있으면,
1억 2천 대출도 야금야금 모은 돈으로 중도상환 하면 이자도 덜 갚을 날이 오겠거니 했던 차에,
수강료에다 치과비에다 갑자기 큰돈이 다 나가 결국 내게 0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었다.

사실 0이 아니라 여기에 친구에게 빌린 돈 100만 원이 남아 있었으므로 -100만이었다.
막내이모가 주신 돈에서 50 남은 것도 한국에 들어오시면 돌려드릴 생각이었으므로 -150만이었다.

대출금은 변동금리라 운 나쁘게도 지난달보다 상환액이 더 많아졌다.
앞으로 전망은 더 나쁘다고 은행차장이 미리 말해 준대로 대출상환금은 예상보다 더 많아질 것이 거의 뻔해 보였다.

오늘 월급 받자마자 대출금에, 지난달 카드값에, 친구에게 빌린 돈 등등을 다 나누니 남는 돈이 없었다.

0부터 다시 시작하기.
아니, -150만부터.
아니, -1억 2400만부터.

이런 상황에서 사무실에 갑자기 한 10대 단발머리를 한 마른 소녀가 덧신, 양말 등을 한 보따리 들고 들어왔다.
자신이 가장이라서 양말을 팔고 있는데, 본인도 남을 돈이 있어야 해서 가격이 조금 비싸다고 했다.
마침 국장님이 앞에 서 계셔서 국장님에게 양말을 두 켤레 6000원에 사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운동화를 쑥 벗어 오른발 내보이며 자신이 신고 있는 건데 튼튼하고 좋다고 했다.
국장님은 나를 보며 이 양말이 시중에서 얼마에 파냐고 물으셨다.
내가 모르겠다고 하자 마음씨 좋은 국장님은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를 내치지 않고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들을 꺼내셨다.
세어 보니 5장이었다.
국장님은 “이거밖에 없는데...”라며 돈을 아이에게 건넸는데, 아이는 무척 난감해 하는 표정이었다.
1000원 부족하게 양말이 팔리는 게 살이 깎이는 것마냥 느껴져서 내가 “잠깐만요.” 하고 얼른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1000원 더 드리면 되는 거죠? 5000원 주신 거죠?”
나는 내 자리에서 손 뻗어 천 원을 건내는데 불과 두 발자국 거리에 있는 이 아이는 자기 발 옆에다 둔 양말 보따리 가방을 발 떼면 지나가는 개라도 훔쳐 갈 것마냥 주춤주춤하다가 후딱 내게로 와서 돈을 받고 얼른 가방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감사하다며 나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왜 굳이 천 원을 주었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아이가 간 뒤에 후회했다.
갑자기 들어와서 생돈 뺏기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지만, 소녀가장이라는 아이를 잠깐 앉혀 놓고 냉장고에 간식이라도 꺼내 두어 개 쥐어 줘서, 집이 어딘지, 왜 이 시간에 학교에 있지 않은지, 동생이 있는지, 이 물건들은 어디서 나서 팔고, 어떻게 생활을 이어 가고 있는지 물어볼 수는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대화해 본 뒤에 양말을 사 주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기계적인 자기소개에 처음엔 마음이 열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된 데에는 무수한 거절들 속에서 자신을 더 이상 다치게 할 수 없는 방어 수단으로 어떻게든 양말을 계속 팔 의지가 꺾이지 않고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월급 받고 다 털린 데서 꺼내 준 천 원이었다.
자기 삶을 자기 힘으로 꾸려 가야 하는 고통과 부담을 알기에 외면할 수 없는 천 원이었다.
하지만 내가 주고 싶은 건 천 원만이 아니었다.
가방을 두 발짝 놔 두고 나에게 오는 것조차 고민해야 할 만큼 그 양말들은 이 아이가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되는 전부 같았다.
아이가 나갈 땐 웃으며 나와 국장님 눈을 보며 인사했지만 난 가슴 아파서 그 눈을 오래 볼 수 없었다.
그것도 후회됐다.
그 짧은 시간에 우린 차가운 공기와 경계의 시선으로 대했고, 다행히 누군가 지갑을 열었지만 온전히 따뜻하게 대해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돈이 더 털려야 어린 가장의 처지를 내 삶처럼 알아줄 수 있을 건가.
다음에 만난다면, 혹 그 상황이 재현된다면, 그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이 손에 돈을 꼭 쥐어 주고, 안부나 이름이라도 물으며, 나갈 땐 잘 살라고 따듯하게 응원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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