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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80회 - 인생은 아름다워, <조커>

Shaoli 2019. 10. 19. 11:36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린 뒤 나는 퍽 재밌어 하며 선생님에게 “별로 중요한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 말 안 했었는데, 제가 여기 올 때마다 선생님 뒤에 어떤 신사 같은 남자가 보였었어요. 3주 정도 보였는데, 키는 보통에 좀 마른 편이었고 얼굴이 긴 편이었어요. 그래서 저 남자는 누구지, 선생님한테 영향을 많이 주는 사람 같은데, 아버지인가? 오빠인가? 생각했어요. 아니면 선생님이 따르는 정신분석가인가? 그런데 공부하면서 프로이트 책에 있는 표지를 보니 프로이트랑도 닮은 것 같더라고요.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저희 할아버지랑도 닮았네요! 그럼 우리 할아버지였을지도 모르겠어요. 하하하.”라고 말했다.

아마 지금껏 정신분석 받던 시간 중 가장 유쾌하게 웃었던 때 같은데, 선생님은 내게 “지금도 그 사람이 보여요?”라고 물으셨고 나는 명랑하게 “아니요. 지금은 안 보여요. 아마 저한테 어떤 시기가 지나가서인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 시기란 것이 뭔지 나도 모르지만 일시적으로 남들이 보이지 않는 게 보이는 경우는 종종 있었고, 나는 그게 나에게만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서운 형상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걸로 인해 공포를 느낀 적은 없어서 특별히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신분열증에 대해 알아보면 음성이든 양성이든 현실 검증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에겐 조금 아리송했다. 적어도 나는 어떤 게 현실이고 어떤 게 나에게만 보이는 건지 알았기 때문인데, 요즘은 그것도 아닌 듯했다.

내가 보이는 것들이 단순히 상상의 산물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 보이고 그 자리에서 나에게 웃음이나 슬픔, 아픔, 낯설음 등의 깊은 정동과 반응을 가져온다는 점,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 봐도 그게 현실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나의 현실’과 하나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일반인들 기준으로 볼 때 현실 검증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정신분석 79회기에서 어머니의 배신, 괴한의 성추행, 가짜 맹인으로부터의 도망 등등으로 마지막 기억을 털고 다음 날 왼쪽 관자놀이가 순간순간 누가 푹 찌르고 간 듯이 아팠다. 그동안의 긴장 때문이었는지 열흘간 시작하지 않던 생리가 시작되더니 어느 때보다 더 많은 피를 쏟아냈다.

80회기 분석하던 날 화장실에 생리대 가방을 두고 집에 가서 다음 날 출근 전에 건물에 찾으러 갔다. 설마했지만 역시 가방이 없었고, 미화원이 버린 듯했다. 면생리대여서 계속 쓸 수 있는데 너무 아까웠다. 다시 회사로 걸어가는데 그때부터였는지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멍한 건 아침부터 그랬고, 붕 뜨기 시작했다는 게 맞는 듯하다.

길 가다 고갤 들어 보니 서머셋 호텔이 아침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보였다. 한 번도 눈에 띈 적 없었는데 거기 있는 창문들이 하나하나 보이면서 호텔에서 투신자살했던 장국영,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교회 친구가 떠올랐다. “이런 상태라면 저 위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며칠 전 목매어 자살한 설리도 떠올랐다.

예전엔 죽고 싶어도 차마 죽을 수 없는 마음이 한 켠에 있었는데, 이런 정신이 붕 뜬 상태라면 충분히 세상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죽더라도 남은 사람들이 충격이나 죄의식을 갖지 않도록, ‘나는 내 삶을 다 산 것뿐이며, 인간은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가장 우울했던 전날 저녁, 인사동을 지나가다 평소에 없던 캘리그라피를 무료로 써 주는 아저씨를 보았다. 배가 고파서 빵집에서 슈크림빵을 사고 분석 전에 어서 먹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저 아저씨에게 글귀를 하나 써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글 하나만 써 달라고 했다.

“뭐라고 써 드릴까요?”
“인생은 아름다워.”

아저씨는 붓으로 글자 하나하나 쓰고서는 “자. 이대로 드릴까요? 아니면 스티커가 있는데 붙여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스티커 붙여 주세요.”
“하트랑 별이 있는데 어느 걸 붙여 드릴까요?”
“음... 별 하나, 하트 하나요.”
아저씬 첫 글자 위에 별을 하나 붙이고 끝 글자에 하트를 붙여 주었다.
“붓으로 쓴 거라 말릴 시간이 필요해요. 잘 말리세요.”

나는 고맙게 받고 그냥 가기 미안해서 방금 산 슈크림빵을 아저씨께 드렸다. 아저씬 의외의 보수에 깜짝 놀라며 처음으로 고개 들고 웃으며 감사하다고 하셨다.
얼굴 보니 30대쯤 돼 보이는 착한 청년 같았다.



나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을 때 인생이 아름답다는 말을 붙들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되든 난 인생이 아름답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그날 밤, 동기 지혜 목사가 <기독 공보> 문화란에 쓴 <조커>에 대한 글을 보고, 유튜브에 10분 요약 영상을 찾아봤다. 영화 <조커>는 비참하게 살아가던 가난한 광대 주인공이 마침내 자신을 버리고 조커로 탄생하며 계단을 내려가면서 춤추는 장면을 보여 준다. 그 모습에서 난 탈피(脫皮)의 기쁨과 자유를 느꼈다.

그리고 아마 그때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빛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로 의식이 전환된 듯했는데, 다음 날 아침 출근 길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 다 검은 톤이 내려앉은 세계에서 평범하고 아무 멋없는 사람들 같았다. 너무 평범해서 비웃음이 날 지경이었고, 동시에 이들 가운데 혹 범죄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내 눈에 빛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일 것 같았다.

길에서 검은 코트를 입은 20대 여자 분이 내 옆을 쓱 지나갔다. 너무 순하게 생긴 얼굴에서 진한 어둠을 온몸을 휘감은 듯 보인 여자는 이 환한 아침에 혼자서 강한 시커먼 기운을 내뿜으며 차갑게 지나갔다.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악한 것을 보고 놀라는 이들은 선하기 때문이지만, 그 악을 모르는 선은 그 무지가 폭력이다. 선에서 악으로 내려가 본 사람 눈에는 선이 자신과 얼마만큼 멀리 높이 있는지 보게 되고, 그래서 선하다는 사람들보다 더 확실하게 선의 아름다움을 보고 웃는다. 하지만 거기서 보는 선의 아름다움은 슬프고 아득하며 가닿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동경하고 그리워하면서도 ‘악을 아는 선’이 아닌 이상 모든 선은 위선이거나 반쪽짜리로만 보이기에 파괴하고 복수할 수 있는 것이다. ‘악을 모르는 선’은 악과 대립할 뿐, ‘선을 아는 악’보다 못한 가증스런 악이기도 하다.

무의욕증, 무쾌감증 같은 정서적 둔마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정신분열증 음성 증상 중 하나다. 이 사회의 요구와 기준에 맞춰 살 능력이 없으니 감옥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전엔 수녀원에 가고 싶었지만 이젠 판에 박힌 성무일도도 하고 싶지 않아서 감방에 있는 게 더 인간적일 것 같다.(그렇다고 누군가를 해쳐서 가고 싶지는 않다.) 한국에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한 거주지역과 시설이 있다면 거기서 살아도 좋겠지만 아마 당장은 내가 안전하게 보호받고 살 방법은 없을 듯하다.

지인이 내게 결혼상대를 소개해 주려고 했다. 이젠 그럴 때마다 “제가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요.”라고 거절하고 싶지만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얼버무린다. 많은 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봐 주는데 그럴 때마다 고충을 말할 수 없어 너무 외롭다.

해마다 이맘때 내년 다이어리를 샀다. 내년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가지려고 다시 학교 다닐 때처럼 손으로 다이어리를 쓰기로 했다. 예쁜 다이어리가 도착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2020년을 펼쳤지만, 어느 날짜에도 뭘 적고 싶지 않았다. 그저 2019년 12월 페이지 5일에 한 글자 한 글자 “내 37번째 생일이야. 열심히 살았어.”라고 적었다. 2020년 12월 5일에는 마음속으로만 “38번째 생일이야. 이때도 살아 있니?”라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