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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 그리고 깨어남에 대한 단상 본문

書簡

에덴동산 그리고 깨어남에 대한 단상

Shaoli 2020. 2. 27. 17:56

어디서 본 글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사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어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된 건 분별력 없는 아기였던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세상과 사물에 대한 인식이 깨었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에덴동산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필연적 성장 과정이 에덴에서의 쫓겨남으로 표현되고, 이로써 인간은 더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며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길을 걷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에덴동산은 아기였던 때 엄마 품에서 먹고 자고 아무 근심없이 전적인 돌봄을 받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돌봄 속에서 만족도가 높은 아기가 있는 반면 제대로 또는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한 아기도 있다.

말 못하고 세상을 모르며 오직 자기 세계 안에서 자신에게 와 주는 다른 사람을 의존해서 살 수 있는 아기에게 배고픔, 추위, 낯설고 안전하지 못한 환경, 불편한 돌봄은 일종의 박해로 다가온다. 즉 세상이 나를 공격하고 해치고 죽이려 한다는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불안이나 불쾌감, 또는 피하고 싶은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건 모두가 영아기에 그런 감당할 수 없는 정서를 많든 적든 느껴 봤기 때문이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단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늦게라도 달려와 주는 엄마는 자신에게 구원자가 된다.

아기는 사실 자기 엄마가 누군지 모르지만 이때부터 세상을 둘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나를 박해하고 죽이려는 세상과 나를 살려주고 구원하는 세상으로 나뉜다.

이 인식은 어른이 되어서도 정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살면서 좋은 대상들로부터 좋은 경험을 많이 하면 나쁜 대상(세상)의 영역이 줄어들면서 나쁜 대상으로부터 압도되지 않는 건강한 자아가 세워지고, 그렇지 않으면 자아는 계속해서 박해와 파괴되는 환상에 휘둘린다.

특히 삶이 생각 같지 않을 때, 스트레스 받을 때, 두려운 상황을 맞을 때처럼 어떤 위험한 상태가 될 때 영유아기로의 퇴행이 진행되면서 그때 느꼈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보통 '악마'라고 하는 것들은 사실 영아기 때 자신이 소화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었던 박해적 경험을 준 보호자가(보호자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지라도) 나쁜 대상의 씨앗으로 남아서 생긴 자신의 환상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자신이 두려워하던 나쁜 대상과 사랑하던 좋은 대상, 즉 보호자가 사실은 한 사람이었다는 걸 통합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전제조건은 좋은 대상의 영역이 더 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아이는 이 좋은 대상에게 나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대상이야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보면 대부분 나쁜/좋은을 나누는 분열 상태에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내가 건강한지 아닌지, 통합된 편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은 내 안에 악마-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가 있는지 보는 것이다.

아기가 자라면 스스로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며 대상을 향해 찾아갈 줄 알게 된다. 자기의 몸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걷기 시작하고 뛰면서 넘어지지 않는 법도 터득해 간다. 그건 즉 더 이상 보호자 품에만 의존하지 않고 에덴동산의 영역을 넘어 더 큰 세계로 자신의 인식과 선택에 의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는 걸 의미한다.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고 더 많은 걸 보고 알고 '선택'할 줄 아는 것. 강신숙 수녀님이 강론에서 말씀하셨듯 "악마는 세상을 가리는 자며,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하는 자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게 하는 자다. 그는 진짜 보아야 할 것과 들어야 할 것을 가린다." 이와 반대로 인간이 된다는 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며, 보기 싫은 것도 볼 수 있고, 듣기 싫은 것도 들을 수 있어 자신의 좋은 대상/나쁜 대상이라는 유아적 환상에 매몰돼 진짜 봐야 할 것과 들어야 할 것을 가릴 줄 모르는 아이에서 성장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악마)가 내민 것은 생사불멸과 깨달음, 선악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화두였다."

우리는 오히려 '좋음/선'에서가 아니라 '나쁨/악'에서 진정한 선을 깨닫고 생사불멸에 대한 화두를 끊임없이 던지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즉 좋은 대상으로 나쁜 대상을 통합해 가는 온전함으로 통합되어 간다. 그때 부처와 예수 같은 깨달음 얻은 이들은 더 이상 생과 사에 얽매이지 않았고 모든 것에 자기 가치와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으며, 저 스스로 자존(自尊)하며 자재(自在)할 수 있어 인간 본래의 모습을 이뤘다. 그렇게 참 인간이 된 이는 육신이 죽어도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불멸이 된다. 그 생명이 이 땅에 남아 계속해서 인간과 하나되어 참된 것-진리-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다만 강신숙 수녀님이 "악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긴 한데 그것은 단연 사람들이 깨어나는 일이다."라고 말씀한 것처럼, "사람들이 깨어나 자신을 지배해 온 실체를 알아채는 일"은 나 자신을 장악하고 압도했던 그 나쁜 대상으로부터 온 박해 환상은 실제가 아니고 사실,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일이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해 온 악마의 작전에 마침내 ’브레이크가 걸렸다‘. 깨어난 자, 세계를 일깨울 그 첫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그 첫 사람이 그리스도교에선 예수이면서 또한 오늘날 깨어날 나 자신이다.

사실 얼마나 많은 이가 자신의 환상 속에서 세상을 보며, 세상이 그렇다고 이해하고,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자신을 옥죄어 사는지 모른다. 영아기 때 경험한 박해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 요새지만, 결국 그곳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악마가 함께 살고 있는 좁디좁은, 더 이상 현실에 있지도 않는 에덴동산이다. 몸만 밖으로 나왔고 정신은 아직도 그 안에서 자라지 않고 있어 평생 끝없는 방황과 불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자신이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경멸하고 혐오하는 악마라는 대상은 사실 나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안아 주었던 내 엄마(누군가에겐 다른 사람)였다. 오늘날 각종 심리정신적 문제들은 그 대상을 내가 사랑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내가 엄마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고 증오한다는 사실을 부모에게 의존된 어린아이는 인정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부정하고, 그 부정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자신을 학대하고 벌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건 깨어남이다. 깨어남은 예수의 40일(이건 물리적 40일이 아니다) 광야 금식처럼 길고 긴 오랜 세월의 환상 벗김, 거짓 나의 탈피, 영아 때 연약해서 수치스럽고 가엾었던 무의식 속에 꽁꽁 숨겨 놓은 나 자신을 열기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절대적 좋은 대상에게 의탁하며 그분 안에서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그분과 하나됨으로써 깨어날 때 나는 하느님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리고, 나의 왜곡된 환상에서 깨어나 살아 있는 현실을 바로볼 수 있는 이로 거듭난다.(사도 바오로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이 떠오르는데, 깨어난 뒤에도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은 깨어난 만큼 현실을 사랑한다. 그건 현실이 겉보기에 살기 좋아서만이 아니라 하나됨과 진실에 대한 인식은 사랑 안에서 믿으며, 믿음으로 넉넉히 소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 강 수녀님 강론 마지막처럼 예수 또한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셨다. 나 자신을 깰 수 있는 용기, 환상을 벗어낼 수 있는 용기, 기존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 익숙하고 안온한 자리를 떠날 수 있는 용기, 죽을 수 있는 용기, 이 모든 걸 예수가 몸소 이겨내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이란 이 길을 따라가며 그분과 같이 깨어난 인간이 되도록 그리고 늘 깨어 있도록 이끌어 주는 마음의 등불과 같다.

요즘 고뇌가 많았다. 깨어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이는 진실을 포기할 수 없다. 한 번 주어진 인생을 꿈과 환상에만 매몰되어 살고 싶은 이는 없을 것이다. 진정 살아 있는 느낌은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는 충만함과 섬세함, 평안함 그리고 생명과 죽음이 순환하는 사계절을 품으며 살아 있음 그 자체로 자신이 채워지는 것이다. 예수도 살아 있는 인간을 보길 원하셨고, 이는 모든 인간의 염원이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고자 태어났고 살고 있다. 각자 자신의 세계에 갇혀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손 내밀면 닿아 체온과 피부 촉감이 느껴지는, 그래서 나 또한 살아 있는 인간임을 느끼게 해 줄 깨어난 자들을 세상은 기다리고 있다. 이 나누어진 세상을 하나로-엄마를 있는 그대로- 봐 줄 줄 아는 통합된 인간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디테일에 숨은 악마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오늘 광야에서 받은 예수의 유혹은 앞으로 예수가 직면할 세계의 실체를 보여 준다. 예수가 받은 유혹에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근원적 욕구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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